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육백 마지기를 다녀오며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5. 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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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백 마지기를 다녀오며

 

처음 좋은 기억이 남아있는 곳은 다시 찾고 싶은 추억들이 있다. 육백 마지기가 그런 곳 중 한 곳이다.

초가을 길목, 육백 마지기에서 수국농장을 하는 회원의 초대로 일 개월 전부터 계획한 일을 좋은 벗들과 함께 큰맘 먹고 다녀왔다.

 

육백 마지기는 청옥산 정상의 다른 이름이다. ‘육백 마지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호기심과 설렘이 앞섰다. 이십여 년 전 강원도 원주에 발령받아 얼마 지나지 않아 미탄면 산나물 축제가 열려 아내와 함께 찾았다. 마을 어귀에서 정상에 오르는 길은 비포장도로였고, 초봄 가뭄으로 메말라 풀풀 나는 먼지를 다 뒤집어쓰며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으로 오른 길은 차선 없이 2차선 넓이로 산뜻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정상에도 많이 변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산나물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와 세 번을 다녀왔다. 축제는 시간을 정해 이십 킬로그램 이상 산나물을 채취하면 상품과 교환을 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온종일 정상에서 7부 능선까지 오르락내리락 수없이 반복했지만, 헛심만 들었지 십 킬로그램도 채취하지 못해 상품과는 인연이 없었다. 세시부터 육백 마지기에서 삼겹살 파티가 있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곰치에 삼겹살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뇌에 기억된 그 맛 때문에 해마다 빼놓지 않고 곰치에 삼겹살을 먹는다. 행사장에는 이마 중앙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유명한 탤런트가 홍보대사로 참석해서인지 활기가 있었다.

두 번째 방문은 축제일을 피해서 갔었다. 이때는 순수하게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서 대구에 계신 장모님을 모시고 다녀왔는데 매우 흡족해하셨다. 떡 취나물을 좋아하시는 장모님에게는 가끔 떡 취나물을 넣은 절편을 만들어 보냈다.

세 번째는 갔을 때는 정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돌아서 나와야 했다. 두 해를 연이어서 치른 축제는 정상 부근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더 심각한 것은 일부가 나물을 뿌리째 뽑아가는 바람에 회복이 어려울 정도라고 했다. 휴식년이 필요하고 당분간은 열리지 않을 거라 했다. 아쉬움은 있었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후 축제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편의와 즐거움을 위해 개방했지만, 일부 사람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어 안타까웠다.

이런 기억으로 오른 변화된 육백 마지기의 모습은 상상외로 좋았다.

 

1960년대 산 정상에 화전민들이 정착하면서 10여만 평이나 되는 거친 땅을 개간해 우리나라 최초의 고랭지 채소밭을 만들었다. 오르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자동차로 쉽게 오를 수 있었고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산 정상에는 탁 트인 하늘 아래 15기의 대형 풍력발전기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전망대와 아담한 성 모양의 조형물, 산 능선의 야생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무지개 모형과 의자가 곳곳에 놓여 있고, 포토존이 자리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관이 입소문이 나면서 철 따라 피어나는 야생화와 일몰 사진 촬영, 밤하늘의 별을 보기 위해서 많은 관광객이 찾은 곳으로, 대부분 차를 이용하여 하룻밤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다.

운이 좋았다. 초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청명한 하늘, 솔솔 부는 바람, 따사한 햇살,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니 수줍은 듯 잠깐씩 구름 속에 숨은 태양과 그가 만든 그늘이 감성을 자극하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웅장한 풍력발전기의 돌아가는 날개를 보니 지천(地天)이 돌아가는 것 같아 현기증이 났다. 윙윙거리는 거대한 소리가 조금은 귀에 거슬렸지만 아름다운 분위기에 묻혀버린다.

 

회원은 육백 마지기에서 십 년째 수국을 재배하고 있다. 하얀색, 보라색, 연분홍 수국을 보니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주인 또한 수국과 같이 아름다웠다. 미리 준비해 놓은 구수한 된장국, 갓 수확한 배추, 매운 고추냉이 장아찌, 명이나물, 삼겹살에 삼 년 된 김장김치와 겹들인 점심은 천국에서나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맛이었다. 친환경으로 직접 재배한 농산물이라고 강조한다.

식사 후에 회원이 안내해 준 경로를 따라서 두 시간 동안 구경을 했다. 아름다운 경관과 포토존에서는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했으며, 아직은 젊었음을 증명하며 분위기를 만끽했다. 확 트인 전망은 스트레스를 날리게 했고, 참여한 회원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였다.

아쉬움도 있었다. 사람들 편의만 생각한 개발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면서 나는 큰 소리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있다. 자연 친화적인 관광지를 고민했더라면 더 멋있는 곳이 되지 않았을까?

 

평일인데도 끝없이 차량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더 복잡해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가기로 했다. 수국을 닮은 회원의 전송을 받으며 다음을 기약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이 십여 년 만에 오른 육백 마지기는 기대 이상이었다.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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