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보릿고개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4. 2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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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열한 번째 이야기

보릿고개

 

 

베이비 붐 세대가 겪었던 보릿고개, 그 의미를 정확히 표현한 노래가 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 시린 보릿고개 길,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 곁에 지워져 갈 때-(중략)-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어느 가수의 보릿고개길이라는 가사 내용이다. 지겹게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노래 가사로 표현해 가슴 뭉클하게 한 가요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점심 급식으로 나온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노란 강냉이죽이 먹고 싶었다. 지금은 친환경 식자재를 사용하여 만든 급식으로 전 학년이 공평하게 점심을 먹지만, 그때에는 특정인에게만 지급한 점심 한 끼였다. 점심시간이 되면 이름을 불렀다. 항시 내 이름은 없었다. 처음에는 무엇 때문인지 영문도 몰랐고, 궁금하기도 했다. 학교 뒷산에는 아름드리 노송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강냉이죽을 배식받아 친구들이 먹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거기에 호명되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점심때만 되면 혹시 오늘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기대하지만 오늘도 내 이름은 호명되지 않았다.

강냉이죽을 한 번만이라도 먹고 싶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몰래 배식한 줄에 서 기다렸으나 선생님께 야단만 맞고 먹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다음날도 찾아가 줄을 섰으나 마찬가지이었으며, 세 번째나 돼서야 먹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처음 먹어 본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맛이 좋았다는 기억뿐이다. 그 뒤에도 가끔 선생님의 배려로 친구들과 함께 옥수수죽을 맛나게 먹을 수가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기는 큼지막한 빵이 급식으로 나왔다. 하나만 먹어도 점심 한 끼로 충분했다. 요즘 곰보빵과 비슷했으나 지금의 달콤한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맛은 별로였다. 당시 빵을 운반한 차량이 세 발 자동차였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면 저 멀리 신작로에서 뿌연 먼지를 날리며 우리 곁으로 달려왔다. 차가 도착하면 우르르 몰려나와 빵을 받아서 먹던 진풍경은 보릿고개를 해결하려는 한 단면으로 아련한 추억이다.

5~60년대에는 국제 식량 원조기구(WFP)에서 식량 원조를 받았던 시기였다. 이 시대는 말 그대로 보릿고개 시절이었다. 시대별로 원조를 받던 식량 품목도 달랐던 것 같다. 학교 입학 전에는 분유 덩어리를 먹었다.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원조품이라 쓰인 포대에 담겨 있었는데, 고소한 맛이 좋아 몰래 훔쳐 먹었으며, 너무 많이 먹어서 배앓이를 한 적도 있다. 아마도 영유아의 영양실조를 예방하기 위해서 분유를 지원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후 옥수수와 밀가루가 원조 되었고 배고픔을 잊게 해 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분식의 날로 지정되었고, 70% 잡곡밥은 필수였으며, 위반하면 벌을 받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8남매를 낳았다. 자식을 많이 낳은 연유를 입이 많으면 많을수록 배급량도 많았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당시에 쌀 한 톨이라도 더 받기 위한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베이비 붐 세대의 시작과 끝이었다.

항시 배고픈 시기였다. 먹을거리와 간식거리가 풍족하지 않았던 그때에는 자연에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자연은 우리에게 기꺼이 먹을거리를 내놓았다. 지금도 가끔 그때 먹었던 찔레꽃 순, 삐비, 산딸기, 감꽃을 먹어 보면서 추억에 젖기도 한다. 보리 이삭을 구워 먹던 추억은 특별하다.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즐겨 먹었다. 5월 중순이면 보리가 탱글탱글 영글 던 시기라 주린 배를 해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인원수대로 먹을 만큼만 노릇노릇한 잘 익은 보리 이삭을 베어 모닥불을 피워 구웠다. 익었다 싶으면 불을 끄고 불에 그슬린 잘 익은 보리 이삭 두세 개를 손바닥 위에 놓고 비벼서 보리만 골라 먹었으며,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괜찮았다. 한참 먹다 보면 입가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으며, 서로 쳐다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던 아름다운 기억이 춤을 춘다. 장난기 심한 친구는 타고 남은 재를 손바닥에 비벼 시꺼멓게 해 상대방 얼굴에 까만 칠을 하며 장난치고 놀았다.

70년대 초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어 농촌개량사업이 진행되었고, 식량 증산을 위해서 퇴비를 만들었는데 학생들도 한몫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일정량의 풀을 베어 마을마다 운영한 공동퇴비장에 제출해야만 했다.

통일미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 솔직히 통일미로 밥을 지어도 윤기가 없어 푸석푸석하여 맛이 없었던 쌀이었다. 그래도 쌀밥이니 보리밥보다는 맛이 있었다. 마음껏 쌀밥을 먹어 보자는 취지로 개발한 쌀로써 당시에 획기적인 생산량에 변화를 주었던 쌀이었다. 생산량은 다른 품종과 비교하여 곱절 이상 수확했으니 보릿고개 해결에 큰 몫을 했고,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는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격세지감이 든다. 쌀 소비량이 줄어들어 고민이라 한다. 그만큼 먹을거리는 다양하고 풍족하여 쌀의 비중이 줄어들고 있어서다.

우리 민족에게 쌀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다 내줘도 쌀만은 내어 줄 수 없다고 자부하며, 쌀 사랑은 대단하다. 보릿고개의 중심에는 쌀이 있었으며, 쌀밥을 실컷 먹어 보는 게 소원인 시절이었다.

쌀은 우리 생활에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쌀만이 가지는 소중한 자산이다. 그만큼 내 몸과 같이 귀하게 취급했으며, 한 톨의 쌀이라도 아끼며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보릿고개를 아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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