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땔감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5. 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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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열세 번째 이야기

땔감

 

요천에서 바라 본  남원시 야경

 

 

잊혀진 6, 70년대의 진풍경 중 하나는 땔감을 가득 실은 손수레의 행렬이다. ‘손수레에 어른 키보다 더 높게 나무를 싣고 늦가을의 석양 노을을 바라보며, 뒤뚱뒤뚱 위험천만하게 비포장 좁은 농로를 따라서 길게 이동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고 가슴 찡하게 느껴진다.

전통적인 온돌문화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서 취사와 난방을 동시에 했기 때문에 겨울에는 많은 땔감이 필요했고, 대부분 낙엽이 사용되었다. 그 외에 삭정이라 불리는 마른 나뭇가지와 아카시아 생나무, 장작,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난 후 부산물인 콩대나 들깻대, 왕겨 등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가끔 텔레비전의 보도화면에 북쪽의 민둥산을 보여 주는데, 보고 있으면 어릴 적 고향 마을의 6, 70년대 모습이 떠오른다. 현재 북한의 실상을 알 수가 있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에 농촌 주변의 산은 대부분이 민둥산이었다. 산에 나무는 서 있으나 제대로 자란 나무는 별로 없었다. 땅 표면이 벌겋게 드러날 정도로 낙엽을 모아서 난방용으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땔감은 가을걷이가 끝나는 10월 말부터 시작해 눈이 내리기 전까지 계속된다. 식구가 많아서 난방용 땔감의 소요가 많았다. 겨울 한 철나기 위해서는 전 가족이 나서서 준비해야 했는데, 작은형과 누나, 나 셋이서 도맡아 준비했다. 소가 있는 집에서는 나무가 더 많이 필요했다. 이유는 소죽을 끓여서 주었기 때문이다. 2마리의 소가 있어서 땔감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더 큰 노력이 필요했다.

작은형을 도와 장작, 삭정이, 아카시아 생나무를 겨울나기 땔감을 준비했다. 특히 아카시아 생나무는 화력이 좋고, 불이 잘 붙어서 소죽을 끓이거나 난방용 땔감으로 최고였다. 가시가 많아서 다루는 기술이 필요해 요령과 힘이 좋은 작은 형의 차지가 되었다.

낙엽은 솔잎이 최고였으며, 화력이 좋아 인기는 있었으나, 노력만큼 양이 적게 나왔다. 솔잎과 낙엽이 적당히 섞인 것이 땔감으로 더 좋았다. 누나와 함께 이산, 저 산을 다니며 낙엽이 많이 쌓여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해마다 다른 지역을 찾는 것은 아니고, 매년 거의 같은 지역에서 작업했다. 높고 깊은 산일수록 낙엽은 많았으나, 어린 남매는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좀 더 쉬운 낮고 깊지 않은 산의 낙엽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산 중턱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갈퀴를 이용 긁어 내린 방법으로 일했으며, 한번 내릴 때마다 꽤 많은 양이 모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산을 오르내리는 힘든 일이었다. 낙엽이 많지 않을 때는 나무에 올라 떨어서라도 긁어모을 때도 있었다.

농한기에 특별한 소득이 없는 가구에서는 땔감을 팔아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도시에서도 아궁이가 많아서인지 수요가 많아 소득이 괜찮았던 것 같다. 매일 이른 새벽에 나무를 실은 손수레가 20리 길을 단속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오가고 했으니, 이러한 모습은 가난한 6, 70년대 농촌의 애잔한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다른 모습도 있다. 60년대 중반부터는 산림녹화 사업이 진행되었는데, 여기에서 단속반원들과 잦은 갈등이 빚어지곤 했다. 단속반원의 단속이 심한 시기였다. 단속에 걸리면 모두 빼앗겼기 때문이다. 나무 장사를 해서라도 돈벌이를 해야 하는 사람, 낙엽 땔감이 없으면 취사와 난방을 할 수 없었던 농촌 실상이다 보니, 단속되었다 하더라도 모질게는 하질 못했다. 단속의 기미가 보이면 누군가는 망을 봐야 했으며, 단속을 피하고자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농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70년대 초에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농촌 모습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 시작은 마을 안길 정비부터 시작되었다. 소달구지가 겨우 지날 수 있는 마을안길은 자동차가 교차할 수 있는 정도의 넓이로 확장되었다. 도로를 정비하면서 집마다 담장을 같이 정비하여 좁은 도로부지로 이용되었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격이다.

다음은 주택개량 사업이 시작되었다. 초가지붕은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변하였고, 아궁이는 보일러로, 부엌은 집 안으로 즉, 입식 부엌으로 변화되어 생활이 편리해졌다. 더욱더 획기적인 일은 전기가 보급된 사건이다. 1971년 초에 우리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전깃불은 농촌의 삶의 질을 한 차원 더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주거환경이 변화되면서 낙엽을 이용한 땔감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많이 모을 필요가 없어졌다. 또 한 나무 장사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산림 단속반원들과의 실랑이도 더 볼 수 없었다.

 

땔감이 많이 소요되었던 온돌식 아궁이 문화는 반만년을 이어온 우리 민족의 영원한 문화유산으로 어느 민족에서도 볼 수 없는 우수한 난방구조다. 건강을 생각하게 되며, 자연 친화적이다. 아궁이와 낙엽 위주의 땔감 문화는 우리 조상의 한 역사다. 역사의 뒤안길로 나 앉았으나, 영원히 잊힐 수 있다. 나무 장사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다. 기억할 가치가 충분하게 가지고 있다. 급격하게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변화되면서 편리성과 에너지 효율성은 좋아지고는 있으나, 온돌식 아궁이 문화는 급격하게 쇠락해 가고 있다. 일반주택에서도 온돌 난방이 아니고 물 순환식으로 난방을 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온돌 주택이 일부나마 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온돌식 난방은 문화유산으로 보존할 충분한 가치가 있다.

땔감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글을 쓰면서 자료를 모으고,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다 보니 당시의 농촌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자료와 글이 부족하고 빛을 볼지 모르겠지만 어디엔가 한 줄의 기록이 되어 알릴 수 있다는 보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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