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고구마와 동치미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5. 7. 10:07
728x90
반응형

<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열다섯 번째 이야기

고구마와 동치미

 

 

 

엄동설한에 먹었던 뜨끈한 고구마와 시원한 동치미는 찰떡궁합이다. 마을이 지리산 자락이다 보니 춥기도 하고 눈이 많이 내렸다. 산골 마을에 눈이라도 내리면 오갈 데 없이 며칠씩 발이 묶이게 되면 유일한 먹을거리인 고구마는 큰 위안거리였다.

지금은 영양 간식으로 가장 선호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구황작물로 부족한 양식을 보충해 주어 집마다 귀중하게 다루고 있었다.

온돌방 윗목의 구석에는 고구마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온도에 민감하여 얼게 되면 썩기 때문에 보관을 잘해야만 했다. 그래야 한겨울을 날 수 있었다. 우리 집 역시 여느 집과 똑같이 수숫대로 발을 만들어 놓은 보관소에는 어른 키보다 높게 고구마는 쌓여 있었고, 한겨울이 지나면 바닥이 보였다. 꺼내 먹다가 크고 튼실한 놈은 따로 분리해서 보관하여 봄에 씨 고구마로 쓰였다. 고구마 씨의 순은 직접 재배하여 사용했다. 어렸을 적 어느 해 봄에는 싹을 틔우기 위해서 심어놓은 고구마를 캐 먹고 어머니께 엄청 혼이 났던 기억도 있다.

 

고구마는 여러모로 우리 식생활에 밀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고구마 순을 이용하여 김치를 담갔으며, 말려서 겨울 묵나물로 즐겨 먹었다. 7월 고구마 순을 적당하게 따 주어야 땅속의 고구마가 잘 들게 된다. 따는 시기를 놓치면 줄기만 무성하게 자랄 뿐 고구마가 잘 들지 않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 따낸 순은 일부는 김치로, 일부는 삶아서 말린 후 겨울 반찬으로 먹었다.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는 것이 고구마다.

어머니께서는 유난히도 고구마에 애착이 많으셨다. 밭농사 절반은 고구마를 심었다. 식구가 많아서 자식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무엇을 해도 항시 부족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구마가 필요했고, 그래서 많이 심었다.

당시 고구마는 밤고구마와 물고구마 두 종류로 구분을 했으며, 황토 땅에서는 밤고구마, 마사 땅에서는 물고구마가 나왔다. 껍질 색이 짙은 것은 밤고구마, 옅고 길 다란 것은 물고구마다. 먹는 방법도 달리했다. 밤고구마는 밤과 같은 식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주로 생으로 먹거나 삶아서 동치미나 김치와 함께 곁들여 먹었다. 물고구마는 삶아 놓으면 물렁물렁하여 주로 구워서 먹었으며 당도가 높고 부드러워 목 막힘이 없어서 동치미와 곁들여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고구마를 구워서 먹었던 맛은 일품이다. 화롯불에 구운 때도 있지만, 양이 적기 때문에 아궁이의 불을 이용하면 더 많은 양을 구울 수 있어 식구들이 나눠 먹을 수 있었다.

한겨울 간식으로 먹기도 했지만 매일 점심 한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 죽을 끓어 먹었다. 잘 익은 김장김치와 고구마, 그리고 밥을 넣고 끓인 것으로 이것을 지 죽이라 했다. 겨울 방학이 되면 쌀을 아끼기 위하여 식은 밥 조금만 있으면 한 식구가 충분하게 점심을 해결할 수 있었다. 지 죽은 김치의 얼큰한 맛과 고구마의 단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꿀맛이었다. 매일 먹었기 때문에 물리기도 했지만 추운 겨울날 뜨뜻한 죽 한 그릇은 추위를 이겨냈고, 배를 채우며, 영양 보충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그 시절 겨울이 되면 김장을 많이 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김치와 동치미를 많이 담근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지 죽과 동치미는 고구마를 맛있게 먹는 방법으로 어머니의 겨울나기를 위한 생활의 지혜였다.

지 죽 이외에 고구마를 이용한 추억의 음식은 고구마 고추장이다. 삶아서 먹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작은 고구마나 줄기들은 골라서 버리지 않고 조청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메줏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어서 만들었는데 찰지고 매콤하면서 단맛이 좋은 고추장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자주 만들지는 않았다. 한 숟가락의 고추장으로 밥을 비벼서 먹었던 기억은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돈다.

 

베이비 붐 세대라면 어린 시절 이러한 많은 추억을 먹고 산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아련한 추억들은 그리로 자꾸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은 겨울나기도 녹록지 않았고, 항시 배가 고팠다.

 

지금은 영양식으로 즐겨 먹는 고구마를 잘 먹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식욕이 나질 않는다. 식이섬유가 많이 포함되어 있고 저 탄수화물은 건강식품으로 사랑받고 있다. 다이어트, 성인병 예방, 장 건강과 변비 해소, 항암효과, 피부미용 등 그 효능은 다양하다.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런데 나는 왜 싫어할까? 어려서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럴 그것으로 생각해 본다. 그래도 먹기 위해서 노력은 하고 있다.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기억 하나인 생으로 먹어 보기는 하지만 그때 맛이 아니다. 삶아서 말린 고구마를 먹어 보는데 거부감이 없어 다행이다. 올해는 수확기에 준비해서 간식으로 먹을 예정이다. 효능으로 본다면 고구마보다 더 좋은 건강식품은 없어 보인다. 건강을 위해서 먹기는 하지만 추억 속의 맛이 나질 않는다. 먹을거리와 영양 간식들이 풍부하다 보니 고구마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맛을 잊어버린 것이다. 품종도 다양하게 개발되어 영양이 풍부해서 좋지만, 옛날 맛은 아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도 않는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왠지 정이 가질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멀리했는지 모른다. 현대인의 건강을 지켜주는 고마운 음식임은 틀림없다.

가장 토속적인 고구마와 동치미 맛을 생각하면 군침이 돈다. 장독대 김치 항아리에서 자연적으로 숙성된 살짝 얼려진 동치미와 뜨끈한 고구마는 또 하나의 행복이었다. (20216)

 

728x90
반응형

'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에 내리는 눈  (2) 2024.05.09
운동회의 추억  (0) 2024.05.08
동지와 팥죽  (0) 2024.05.02
땔감  (0) 2024.05.01
내 고향 정월 대보름  (0) 2024.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