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봄에 내리는 눈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5. 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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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열일곱 번째 이야기

봄에 내리는 눈

원주 매지길 벚꽃

 

섬진강을 따라 매화가 선두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산수유꽃이 달리다가 벚꽃이 이어받아 맵시를 뽐내며 달리는데 불쑥 샛노란 병아리, 아니 개나리가 둥글둥글 구르며 자랑한다. 다음으로 핑크빛 머플러를 두른 진달래가 이어 달린다. 참 요란한 봄의 경주 놀이다. 이런 섬진강과 지리산이 있는 고향의 봄을 좋아하며 사랑한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중략)” 어린 시절 산과 들을 뛰어놀면서 많이 불렀던 노래다. 섬진강은 지리산과 덕유산이 발원지이며 남원을 지나서 광양만으로 흐르는 우리나라 44대 강 중 하나다.

 

지금은 어디에서나 매화, 산수유, 벚꽃. 목련화, 개나리, 진달래, 철쭉 등의 꽃과 각종 야생화를 흔하게 볼 수 있고, 아름다운 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꼭 이런 화려한 꽃이 아니더라도 작은 풀꽃도 정겹다.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다.

어린 시절, 봄의 기억은 꽃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즐기기보다는 친구들과 재미있게 뛰어노는 게 더 좋았다. 봄이 되면 꽃이 피려니 했을 뿐 꽃이 피고 지는 자연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거나, 작은 풀꽃을 보면서 아름답다거나 신기해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그러나 봄꽃 중에 벚꽃의 기억만은 새롭게 다가온다. 4월에 눈을 내리게 하는 벚꽃을 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본다.

  주촌초등학교 등하교 신작로와 학교 울타리에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심겨 있었다. 2km가 채 되지 않는 길이지만 어린 시절에는 엄청난 거리였다. 학교 운동장 울타리를 꽉 채운 아름드리 벚나무가 꽃의 무게 때문에 휘 늘어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어느 청명한 4월 봄날,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면서 흐드러진 벚꽃을 유혹하면 벚꽃은 눈이 되어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는 거와 같았다.

교실에서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고 가슴은 설레기 시작했다. 마음은 이미 운동장에서 꽃눈을 맞으며 뛰어놀고 있었다.

하늘에서 날리는 모습은 꼭 눈이었는데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은 바람에 촐랑대는 꽃잎이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 하늘을 보며 고개를 들어 눈을 먹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운동장에서 입을 벌리고 이리저리 뛰었지만, 입에 들어온 것은 눈이 아닌 벚꽃이었다. 속은 줄 알면서도 마음껏 뛰놀며 분위기를 즐겼다.

벚꽃은 다른 꽃에 비해 피고 지는 기간이 일주일 정도로 매우 짧았다. 정이 들기도 전에 지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 시간이다. 봄에 함박눈과 같이 내리는 벚꽃 눈의 모습을 좋아한다.

벚나무 길은 어린 시절 많은 추억을 가져다주었다. 수령이 긴 벚나무는 가지가 벌어지면서 가지 사이에 커다란 공간이 생긴 나무가 많았다. 그 공간은 작은 돌멩이들로 채워져 있다. 시험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돌멩이를 던져 그날의 재수 보기를 했다. 등하교 시에는 책가방 들어주기 게임을 하며 놀았는데, 이때 던져 놓은 돌멩이 들이다. 많이 들어가면 운이 좋은 날이고, 적게 들어간 사람은 책가방을 도맡아 들어야 했다. 이러한 소소하고 재미있는 놀이가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벚꽃 길과 학교 교정이 아니었나 싶다. 아쉽게도 지금은 폐교가 되면서 벚나무도 흔적이 없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가슴 시린 아련한 추억이다.

 

군 생활 중 경남 진해에서 8년을 근무했다. 진해는 군항제로 유명한 도시다. 매년 3월 말 벚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군항제가 열린다. 4월의 진해는 벚꽃으로 인하여 별천지, 낙원이라 할 수 있었다. 진해에 들어가려면 장복터널과 안민고개를 넘어야 한다. 진해를 보듬고 있는 산이 장복산이며, 고갯길은 벚꽃 터널이 만들어져 장관을 이룬다. 산 전체가 야생 벚꽃으로 물들어 아름다운 모습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화사함의 극치를 이룬다. 8년 동안 4월의 눈을 맞으며 행복해했다.

  일제 강점기에 진해는 일본의 중요한 군사기지였다. 당연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로 시가지를 조성했을 거라 생각된다.

해방 후 얼마 동안 벚꽃은 ‘사쿠라’라고 불리는 일본 국화(國花)라 하여 멀리하였다. 천대를 받으면서 뽑거나 베어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제주도에 자생하는 왕벚꽃이 우리나라가 원산지라 확인이 되면서, 이후에 가로수로 개량되어 심어졌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벚꽃길이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경남 하동에서 전남 곡성 오곡면 압록 유원지에 이르는 150리 섬진강 변 벚꽃길이 대표적으로, 드라이브 코스로는 내가 다녀본 곳 중 최고다.

내가 사는 원주시에도 많은 벚꽃길이 조성되어 있으나 시기가 짧다 보니 그리 화려한 곳이 많지 않아 아쉬움은 있다. 그래도 볼만한 곳이 있다면 원주천 변 병영 교에서 영서고등학교까지, 단구동 통일 사거리, 시청 길 단관 지구, 매지리 연세대학교 교정이 가볼 만한 곳이다. 원주 근교에는 충주호 벚꽃이 유명하다.

 

벚꽃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봄에 하얀 눈이 내린다. 올해도 벚꽃 눈을 보면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곤 한다. 내 눈을 어지럽혔던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그 무수한 꽃잎들의 춤,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봄의 한 장면으로 내 기억 속에 꼭꼭 담겨있다

(20204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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