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장모님의 가묘(假墓)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4. 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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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일곱번째 이야기

장모님의 가묘(假墓)

 

평상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장모님의 가묘를 해 드렸다. 항시 유언처럼 친정 부모님 곁으로 가야겠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외조부모께서는 장모님께 조그마한 임야를 남겨 주었으나, 양손(養孫)5촌 조카가 외조부모 산소와 함께 관리하고 있다.

 

가묘는 쉽게 얘기해서 가짜 묘'. 가묘의 풍습은 다양하게 전해 내려오고 있다. 본래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집안에 사당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고자 함이었다. 현대에 와서 그 의미가 많이 변해 건강이 좋지 않은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묘를 미리 만들어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액운을 피하고자 가묘를 쓰고 있다.

이런 이유로 부모님을 생각하여 가묘를 쓰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돌아가시지도 않은 분의 묘를 미리 써두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가묘를 써야 무병장수한다. 돌아가시기 전에 묘를 쓰는 것은 불효다.’는 다 맞는 말이다. 가묘는 가족들이 제일 나은 선택으로 만들 수 있느냐라고 생각 한다.. 가묘를 써야 한다는 의견과 쓰면 안 된다는 의견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닌, 가족 구성원이 만족하고 행복해질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생각한다.

 

고향의 종중 묘동(宗中 墓洞)에는 나와 처의 가묘 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장형(長兄)께서 "삼 형제의 가묘를 써 두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제안으로 세우게 되었다. 반대할 줄 알았던 아내도 흔쾌히 찬성했으며, 오히려 만족하고 있다.

 

장모님께서 말씀하신 임야는 경북 영주에 있다. 문제는 5촌 조카가 50년 이상 점유와 관리를 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원한다고 해서 묘를 쓸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장모님 땅이라고는 하지만 반대하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삼 년 전부터 조심스럽게 의사 타진을 했다. 처음에는 출가외인이 다시 친정 쪽에 묻힌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적지 않은 반대가 있었다.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임야가 있는 마을에 장모님을 알고 계신 친척들이 살고 계셨다. 그분들을 찾아가서 협조를 요청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5촌 조카의 허락을 받아 냈다.

2020년 가을 지관을 모시고 그곳에 묘를 쓸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산세와 주변 지세(地勢)를 자세하게 살핀 지관은 묘를 쓴 즉시 자손 당대에 혜택을 누릴 수 있다.’라는 취지로 명당자리라는 말을 했다. 지관의 말에 따르면 보통 명당자리에 묘를 쓸 때 자식보다는 손자부터 혜택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자리는 자식들 대()부터 혜택을 볼 수 있다.”라는 말에 나도 보통 사람인지라 욕심이 생겼다.

 

그 땅은 밭이었으나 관리가 되지 않아 수목이 무성하게 자라 쓸모가 없는 땅으로 변해 있었다. 지관이 알려 준 지점을 중심으로 벌목을 하고 정지(整地) 작업을 했다. 정지 작업을 해 놓고 보니 정말 좋은 땅이 되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지금까지 해 온 일을 자세하게 장인, 장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특히 장모님께서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만족해하셨다.

근심이 생겼다. 수목이 무성했을 때는 쓸모없는 땅이라 할 수 있었지만, 정지해 놓은 땅은 누가 봐도 욕심이 들 정도다. 몰래 다른 사람이 묘를 써 버리면 대책이 없어 보였다. 이때 생각한 것이 건강이 좋지 않은 장모님의 가묘를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먼저 장인의 동의가 필요했다. 가묘라는 장묘문화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였고, “어떻게 산 사람의 묘를 쓸 수 있냐하시면서 처음에는 반대했다. 장인어른도 문제였지만 두 처남의 동의를 구하는데도 어려웠다. 가족 구성원 중 한 분이라도 반대하면 어려운 일이다.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묘의 취지와 내 집안의 사례를 들어서 이해를 구했다. 예상외로 일은 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가족들의 의견과 지관의 조언에 따라 가묘보다는 가묘 비를 세우기로 하고, 장인어른의 이름까지 넣어 합장하는 식으로 했다.

21년 한식에 장인, 장모님과 처가 식구들이 참석하여 가묘 비를 세우고 묘역을 조성했다. 이날 장모님의 만족해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항시 어두워 보이던 얼굴에는 웃음을 보여 주었고, 행복해 보였다. 그렇게도 원하던 곳에 죽어서 묻힐 수 있다는 안도감이었을까? 장모님께서는 변하기 시작했다. 평상시 입맛이 없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의욕이 없어 보였고 누워만 계셨던 분이다. 이후 입맛이 돌아와 식사도 잘했다. 의욕적으로 보조 보행기를 이용하여 걷기 연습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열흘이 지날 즈음 혼자서 걷기가 가능해졌다. 4층 계단을 혼자서 오르내리셨으니 기적 아닌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최 서방 고맙네. 내 소원을 들어줘서.”

어머님 고맙다니요? 자식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닐 세, 최 서방이 아니면 누가 했겠는가? 정말 고맙네. 아흔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장모님의 말씀에 참 잘했다는 위안과 함께 우쭐해졌다.

아흔 살이 아니라 어머님께서는 백수(白壽) 하실 거예요!” 격려해 드렸다.

이는 가묘를 쓴 결과라 보기에는 분명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뤘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상상할 수 있다. 부모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가묘를 써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가묘는 현재의 장묘문화와 상반되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장묘문화는 화장(火葬)하여 일정한 곳에 봉안하는 방법으로 변하는 과정에 있다.

가묘를 쓰면 무병장수한다와 같은 식의 이야기보다는, 살아서 서로에게 큰 위안이 되고, 가족 간에 화목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면 가묘를 쓰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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