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아부지와 아들, 아들과 아빠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4. 5.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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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와 아들, 아들과 아빠

치악산 일출

~!

눈 깜짝하는 순간 4가 넘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며 나는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나서야 극심한 통증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속에서 내 눈에 들어온 분은 아부지였다. 오른쪽 팔 관절이 탈골되어 피부를 뚫고 나와 피범벅이 된 손목을 부여잡고 응급조치를 하고 있었다. 그 다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응급조치를 한 후 병원으로 달려간 분이다. 시내 병원까지 20리 길을 손수레에 나를 싣고 한 달음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4월 초, 먼지가 풀풀 나는 비포장 길을 달린 그분의 모습은 먼지와 땀이 범벅되어 있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계셨다. 그 모습에서 자식을 향한 사랑과 진한 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아부지는 나에게 신비한 존재였다. 아무리 바쁜 농번기에도 흰 두루마리 한복을 입고 다녔다. 집안 농사일보다는 지역 문제 해결에 도움 주는 사회활동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신 분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언제나 똑같이 다림질 잘한 두루마리 한복을 준비해 내조했다. 남자가 밖에 나가서 일하는데 옷차림부터 단정하게 입어야 한다고 어머니는 말하곤 했었다.

인연은 14년이 채 되지 않았다. 1 때 하늘나라로 가셨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부지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가르침은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키우면서 도움이 되었으며,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어느 날 병석에 계신 아부지는 막걸리 한 주전자와 술상을 봐 오게 했다.

막내야, 어머니에게 술 한 상 봐 달라고 해라

! 아부지, 아픈데 술 드시려고요?”

그래, 한잔하고 싶구나.”

! 막내야 거기 좀 앉아라.”

!” 술상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서 마주 앉았다.

술 한 잔 따라라하면서, 나에게도 손수 술을 한잔 따라 주며 말씀을 시작했다.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술은 매우 중요하다. 술은 마음가짐부터 바로 해야 한다. 윗사람이나 아랫사람, 친구와 술자리는 반드시 예의를 지켜야 한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이어갔다.

이렇게 13살 되던 해에 아부지께 술(酒道)을 배우게 되었다. 술상을 놓고 대화는 몇 차례 더 계속되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과 할아버지와의 관계, 아직 이루지 못한 것들을 얘기했다. 물론 어린 내가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으나, 그 의미는 어려울 때마다 내 인생에 나침판이 되어 주었다.

 

할아버지는 남원지역 3·1 운동을 주도했으며, 해방되는 날까지 항일운동을 했었다. 3년간 옥살이를 했으며, 항시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쫓기고 은신을 반복하다 보니, 어려운 집안 살림은 할머니를 도와 책임지며 꾸려야만 했다. 그런데 해방 후 할아버지의 항일 공적 기록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 기록이 없어 아부지 생전에는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아부지께서는 꼭 해야 할 일을 못 하여서 한이 된다고 했다. 우리 자식들에게 반드시 공훈을 찾아서 지위를 인정받으라는 유지를 남겼다. 그 후 45년 만에 손자들의 노력으로 할아버지의 항일운동기록과 3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판결문을 찾아내, 독립유공자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아부지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는 못했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할아버지 대신 가장이 되어야 했다. 해방 후 1950년대에는 면의원을 지냈으나, 항시 주변 사람으로부터 견제와 질시를 많이 받았다. 돌아가실 때까지 어렵고 힘든 삶은 계속되었다.

 

지금까지도 아부지의 정이 그립다. , 고등학교 시절에는 그 빈자리가 매우 컸다. 성인이 되어 지금까지도 아쉬운 정은 마음 한구석에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내가 느꼈던 정을 내 자식들에게는 좋은 아빠의 모습으로 남겨 주고 싶었다. 아들에게는 아빠의 정을 마음껏 누리며, 빈자리를 느끼지 않도록 노력을 했다.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가르치려 노력했으며, 나 자신이 자식들 앞에서 솔선수범했다.

 

어느 날, 아내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다. 그 얘기에 많은 실망 했으나 내색하지 않고 지내고 있었다. 아내에게 혹시 큰처남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는지 물어보았다. 1부터 피운 것 같다고 하기에, “동생은 피워도 되고 아들은 피우면 안 되냐라고 했더니 내 자식만은 안 피기를 기대했다고 한다. 실망하는 눈치였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누구나 겪었던 고민이었을 것이다. 아들이 고2 때의 일이다.

하루는 아들 등굣길을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때마침 앞에 교복을 입은 학생 3명이 담배를 피우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들은 갑자기

저 새끼들이 학생 망신 다 시키고 있네!”

, 그런데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교복을 입고 담배를 피우며 걷고 있는 모습이 정말 꼴불견입니다

그래? 너도 담배 피우는 것 같던데?” 웃으면서 말을 했더니, 아들은 깜짝 놀라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안해했다. 그러더니, 한참 있다가

아빠, 그래도 나는 남모르게 숨어서 피워요

알고 있었다. 항시 조심해라라고 조용히 타이르고 묵인해 줬다. 항시 내 앞에서 조심했다. ‘싸가지없는 놈은 아니었다. 서른 살이 넘은 지금, 아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자식 교육을 하면서 훈계하기보다는, 그들이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나 자신부터 바르게 행동했다. 아들은 아빠의 그림자를 보며 자란다고 한다. 지금 아들의 행동은 나를 닮아 가는 것 같다.

 

나는 아들의 고민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가슴이 더 아프다. 어느새 결혼 적령기가 지났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도 있다. 문제는 집이다. 부모가 물려준 재산 없이 서울에서 집 한 채 장만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들이 거주하고 있는 원룸에서 이틀 밤을 지낸 적이 있었다. 술 한잔하면서 미안하다는 속내를 얘기했다.

많은 지원을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좀 더 너에게 다정다감하게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해 주질 못해서 항시 가슴이 아프다. 네 고민을 알면서도 도움을 줄 수 없으니 미안하고 답답하구나.”

아빠 괜찮아요. 저에게 잘 못 해준 것 없어요. 다 만족한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 잘해 줬어요. 앞으로도 지금까지 했던 대로 해주면 돼요.”라고 오히려 위로한다.

 

아들에게는 친한 친구 여섯 명이 있다고 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중견 회사 경영자 자제라 했다. 언제든지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평생 같이할 친구들이라 한다. 그들이 자기를 좋아해서 만난다고 했다. 지금도 도움을 주려 하지만 거절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하는 아들이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도 하지 못한 인간관계를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되었다.

지금까지 아들을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그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참으로 속이 깊고, 큰 뜻이 있었다. 부족한 점은 채우고 고치며 살아가면 된다. 4가지 덕목(싸가지-신의, 의리, 겸손, 예의)을 골고루 갖춘 아들은 그의 소망대로 꼭 이룰 거라 확신한다.

아부지께 느꼈던 정과 가르침을, 더 큰 정과 가르침으로 아들에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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