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쟁이 바보(최광식) 수필집

무료한 토요일 오후

멋쟁이 바보, 최광식 2024. 3. 1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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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토요일 오후

 

 

토요일 오후 학교 근무를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법정 스님의 산문집 맑게 향기롭게를 꺼내어 읽고 있다.

7월 장마 기간이라 내리쬐는 햇볕이 무덥고 후덥지근하여 등줄기에는 땀이 흘러내린다. 아내가 가져다준 김밥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 후, 더위를 시킬 겸 그늘 막에 앉아 책을 읽으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끔 부는 시원한 바람이 옷깃을 스쳐 지나가며 젖은 땀을 식혀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법정 스님은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 이 글을 눈으로만 스치고 지나치지 말고, 나직한 자신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자신을 향해 읽어보라 하신다. 흉내를 내며 읽고 있으려니,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으르렁거리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부짖고 있다. 한참을 울부짖고 나더니 새카만 먹구름이 몰려와 온 주위가 어두워지며 바람이 세차게 분다. 그리고는 팝콘 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장대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진다. 무슨 한이 그리 맺혀서 그럴까? 으르렁거리며 울면서 그렇게 많은 눈물을 쏟아붓는 거지? 한참 동안 세차게 내리더니 주변이 밝아지면서 소낙비는 잦아들고 있었다. 끝이려니 했으나 또다시 먹구름이 세찬 바람과 함께 몰아치며 더 굵은 장대비가 내린다. ‘쏟아 붓는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릴 듯 무서운 기세로 소낙비가 내린다. 얼마나 지나서야 비는 멈추고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하늘은 밝게 개고 햇볕이 내리쬐고 있다. 참 변화무쌍한 대자연의 모습이라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1시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무료한 오후, 이날 하루 중에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인 시간을 나는 선물로 받았다. 자연은 무서운 감정을 주면서도 이토록 아름답고 신비롭게 다가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 두려움과 고요, 평화로운 감정을 동시에 누리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 살아온 삶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법정 스님은 삶은 놀라울 만큼 깊고 넓은 그 무엇이다. 하나의 위대한 신비이고 우리들의 생명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시며, 삶의 의미를 ““먹고살기 위한 돈벌이에 그친다면 우리는 삶 그 자체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진실한 삶은 놀라움과 신비, 아름다움이다. 사람과 새와 꽃들, 나무와 강물, 별과 바람, 흙과 돌멩이 등 우주 전체의 조화가 곧 삶이요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 님은“70년을 살아봐서 아는데 내 인생을 나도 몰라라고 말한다. 삶 자체는 누구도 모른다. 결과도 알 수 없는 게 삶이다.

지금 나는 어디쯤 와 있을까? 60이 넘어서도 이정표를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지는 않을까?

부질없이 살아버린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적다는 것을 알았을 때 허무한 생각이 든다. 놓아야 할 때 놓지 못하면 삶은 추하게 된다. 잠깐이지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삶의 의미를 되돌아본다. 요란하게 쏟아 붓는 빗줄기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그것이 순리며 조화(造化). 인간만이 잊고 있지는 않은지 나에게 되물어본다.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 와 있느냐?’ 아직도 일과 욕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아등바등 숨 고를 시간도 없이 생활하는 모습을 본다. 오욕과 허영에 싸여 추해진 모습이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비친다.

무료한 토요일 늦은 시간 석양의 붉은 노을을 바라본다. 이 또한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현상이다. 나의 석양 노을은 어떤 모습일까?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간직한 그런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지 꿈을 꾼다. 노년의 허니문 같은 꿈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죽는 것도 이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인생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어르신은 풍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시간의 오묘함을 몸소 체험하며 터득해 왓다. 그러면서 어려움에 부딪힐 때 급하게 서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라고” 말하고, “한고비가 지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정이 바뀔 수 있다.”라고 가르침을 주고 있다.

가끔 사람의 머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는 모습들을 보는 경우가 있다.

참는 것이 복이란 말이 있듯이, 지금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심호흡을 크게 한 후 기다린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 해결할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노년에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살펴보는 것도 지혜로운 삶의 한 방법이다.

맑고 향기롭게를 읽으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 의미 하나하나를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삶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습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몫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최광식 수필집(2021년) [예순, 내 인생 나도 잘 몰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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